강상우

<Leftover>로 보는 그린다는 것이란

 

애착 때문일까? 아니면 코로나로 인해 힘에 부쳐서 일까? 강상우는 지난 10여 년 동안 틈틈이 그려놓은 드로잉들과 소품의 입체, 설치작업, 그리고 연석산 미술관 주변을 담은 페인팅들을 가지고 연석산 미술관에서 <Leftover>전을 열고 있다.

<Leftover>전은 강상우가 주요 토픽과 주제 의식을 가지고 치룬 개인전들과 대비해 본다면 전시된 작품의 양이나 주제들은 그를 알고 있는 지인들이나 미술 관계들에게는 다소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작가 그 자신이 “<Leftover>전은 지난 10년 동안의 전시들의 주요 토픽과 주제의식으로부터 낙오된 잡음들과 일종의 ‘사고의 파편들’을 다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잘못 해석하면 지난 10년 동안의 전시들에서 주변부에 있던 것들을 모아 놓은 전시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Leftover>전에 대한 그러한 해석은 오해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Leftover>전은 “현재까지의 작업 패턴에서 벗어나 지난 작업을 돌아보는 정리의 기회를 가지며, 원시적 상태의 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의 발현”이라는 작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듯이 코로나로 인해 힘에 부쳐서도, 지난 10년 간 간직해 놓은 것들에 대한 애착 때문만도 아니다. <Leftover>전은 지난 10년 동안의 전시들을 성찰해보는 계기이며, 동시에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사색해보는 전시이기도 하다.

강상우의 <Leftover> 전의 작업들은 지난 10년 동안의 전시들과 비교해 보면 주변부의 것들이지만, 또한 그것들은 강상우의 지난 10년 동안의 전시들의 주제 토픽들과 주제 의식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Leftover>는 어찌 보면 지난 10년 동안의 주제 전들과 분리될 수 없는 데리다의 파에르곤(parergon) 개념과도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해 그의 <Leftover>전은 지난 10년 동안에 모아 놓은 주변부의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난 10년 동안의 전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축이기도 한 것이다.

<Leftover>전의 작업들이 지난 10년 동안 데리다의 파에르곤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자면 그림의 액자와 같이 주변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면, <여자의 변신은 무죄>(2019)나 또는 <D(M)ental>(2017)이나, <스타차일드와 몽실통통> (2015)이나, 또는 <똘이장군 21세기편>(2014)이나 또는 <벽에 대고 외쳐라> (2013)나 또는 <다크 순풍>(2011)의 이미지들은 그림의 본체와 같은 역할을 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 동안의 그림의 본체들, 데리다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에르곤(ergon)은 어떤 의미를 건네 왔을까. 그가 10년 동안의 전시를 통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벽에 대고 외쳐라>(2013)나 또는 <똘이장군 21세기편> (2014)을 통해서는 정치 문화를 지적하고 있다면, <D(M)ental>(2017)을 통해서는 사회적인 부문을, <다크 순풍>(2011)이나 또는 <여자의 변신은 무죄> (2019)를 통해서는 “1980년대 전후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홍태림) 것으로 우리 사회의 여성상과 대중문화들의 실체를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10년 동안의 메시지들은 때로는 정치적인 문화를, 때로는 사회적인 문화를, 때로는 대중문화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메시지들은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서로 다른 메시지로도 보일 수도 있으며, 각각의 이미지들만을 독립해서 바라본다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중구난방과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의 10년 동안의 전시한 이미지들을 통해 건네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Leftover>전의 작업들을 통해 비추어 보았을 때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메시지를 건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현실 문화의 실체 -때로는 정치적인 시각을, 때로는 사회적인 시각을, 때로는 대중문화의 시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드러내고 있다.

그가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현실 문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시각적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Leftover>전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Leftover>전은 그가 지난 10년 동안의 보여 준 전시와는 달리 긴장된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어린 시절이나 일상의 것들을 그려냄으로써 우리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또는 닭들이 마당에서 먹이를 주워 먹고 있으며, 그 앞에 약탈자가 발톱을 드리우며 지켜보는 것과 같은 장면이라든가, 또는 혼자서

적막한 밤에 서치라이트를 켜고 산길을 달리는 <Leftover>전의 장면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이나 또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우리의 내면의 심성과 조우하게 한다. 즉 <Leftover>전의 드로잉들은 “개념적, 상징적 사고를 지양하는 대신 조형적, 직관적 사고에 방점을 둔” 것이라는 그의 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현실 문화를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자연스런 심성이나 원초적인 심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성완경이 강상우의 작업에 대해 "오직 예술에 대한 신뢰와 감정적 민감성의 세계 속에 머리를 박고 예술가적 삶에 대한 확신과 그것에 대한 순수한 헌신이라는 가치관 속에서 현실과 괴리된 연약한 세계를 구축하다고 있다.”라고 말한 비평한 글은 주제 의식을 가지고 한 작업들 보다는 예술가적인 순수한 심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Leftover>전의 드로잉들에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완경이 “현실과 괴리된 연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기술한 비평 글은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구절을 보다 더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현실 문화와 괴리된 연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비평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강상우의 그림이 성완경의 비평글과 같이 현실 문화와 괴리되어 있을까. 강상우의 그림은 위에서 분석한 글 들에서 보듯이 현실 문화와 괴리되어 있기 보다는 현실 참여적인 문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성완경이 강상우의 그림에 대해 “현실과 괴리된 연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비평한 글은 <벽에 대고 외쳐라>(2013)나 <똘이장군 21세기편> (2014)의 전시에서 보듯이 참여적인 정치 미술문화에 있어서 직설적인 발언 태도보다는 은유적인 발언 태도를 지니고 있다라는 기술이 보다 더 정확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Leftover>전의 드로잉들과 페인팅, 입체, 설치작업들은 주제 의식을 지닌 지난 10년간의 전시들과는 정반대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데리다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에르곤과 파에르곤과도 같은 관계이다. <Leftover>전의 작업들은 예술의 동인이 블라봐츠키의 신지학의 이론을 빌어 설명하자면 우주의 모든 생명 체들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근원을 알기 위한 것이라는 상기해보면 예술가로서 그린다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그리는 것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현실 문화를 어떻게 직시해야 하는 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조관용(DTC아트센터 미술감독, 미술과 담론 발행인)

연석산우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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