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야기는 또 다른 시각의 역사이다. 


조관용(미술평론가, 미술과 담론 대표)


그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전은 시각적으로 시선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의 전시는 언뜻 보면 페미니즘으로 여겨질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들과 투명한 필름 위에 글씨를 새겨 놓고 일렬로 배열하여 놓은 글들을 통해 식상함과 단조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한 걸음 다가서서 천천히 음미하면 가슴 한편에 아릿함을 주어 전시를 다 보고 난 즈음에는 어느새 눈가에 눈물방울을 고이게 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업들은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작품에서 보듯이 어린 아이가 쓴 것과 같은 글들을 금박의 테두리로 한 액자 안에 담아 전시하거나, 또는 <사라졌고 사라지는 1>의 작품이나 또는 <Ground Zero3>의 작품에서 보듯이 한 화면에는 노란 색의 바탕위에 여성의 신발들을 수묵으로 그려놓고, 또 다른 화면에는 폭발하는 장면들을 전체 화면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딸 가진 여자는 싱크대 손잡이를 잡고 죽는다>의 작품은 다양한 형태의 싱크대 서랍의 손잡이들이 캔버스 중앙 화면에 설치되어 있으며, 손잡이 하단에는 여성들의 각각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무엇보다도 <손톱으로 쓰는 편지>의 작품은 투명한 OHP 필름 위에 글들을 적어 놓고 벽면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 주된 초점이 되는 작업은 <허복연 할머니 글씨>이다.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작품은 마치 어린 아이가 쓴 것과 같이 삐뚤거리면서 소리가 나는 대로 쓴 글씨라서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 글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는 허복연 할머니가 쓴 글들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액자에 담아 전시하며, 그 글의 내용들을 주석으로 달아 글 하단에 적어 놓고 있다.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작품은 글의 내용만큼이나 글씨체들이 당신이 살아 왔던 시대적인 상황들을 그대로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아낸다. 우리 부모님을 회상해보더라도 허복연 할머니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극소수의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허복연 할머니 글씨를 보면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글을 배우시겠다고 몽땅 연필로 공책에 글을 쓰시던 장면이 바로 어제와 같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어머니가 한자 한자 글을 쓰시는 모습은 글을 쓴다기보다 마치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느릿느릿하게 글을 그리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허복연 할머니 글씨체는 어머니의 글씨체에서 보았던 것처럼 어린아이의 글씨체와 같이 삐뚤거리며, 소리가 나는 대로 글을 써서 그 내용을 금방 알아볼 수 없을지라도 그 글씨체를 보고 있노라면 그 내용을 전하기 위해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글을 써 내려갔을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내용들은 ‘딸 낳고서 큰 기합 받는다.’와 ‘아들을 낳는 데 선수다.’와 ‘소변 대변 마려운 학생들을 (벌세우니) 여학생들 밑으로 소변이 흘러나왔다.’와 ‘피난 갔다가 미군에게 강간당할 위기를 맞아 다시 피난을 떠났다.’와 같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작품들은 여성으로써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리고 여성 가장으로서 겪었던 삶의 내용들을 작가인 손녀와 함께 회상을 하면서 구술을 통해 이야기하고 한 소절 한 소절 글로 써놓은 것을 모아놓은 것들이다.

작가가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작품들을 통해 담론으로 제기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라졌고 사라지는1>의 작품이나, <Ground Zero1>의 작품 또는 <딸 가진 여자는 싱크대 손잡이를 잡고 죽는다>나 또는 <손톱으로 쓰는 편지>의 작품을 통해 보듯이 여성들의 시선을 통해 인식하게 되는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시대에서의 여성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것은 <사라졌고 사라지는1>의 작품이나 <Ground Zero1>의 작품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사라졌고 사라지는1>의 작품은 허복연 할머니가 한국 전쟁 당시 우리를 지켜준다고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고 피신하다가 겪은 이야기들을 작가가 은유적으로 그려낸 그림이며, <Ground Zero1>의 작품은 허복연 할머니가 미군을 피해 피난 가다가 미군들이 오폭으로 인해 발발하게 된 익산역(폭격지점)의 폭격을 목격하게 된 장면을 작가가 그림으로 그려내어 그 당시의 참사자들을 추모하면서도 그 상황을 고발하고자 한 그림이다. 

또한 <딸 가진 여자는 싱크대 손잡이를 잡고 죽는다>의 작업이나 또는 <손톱으로 쓰는 편지>의 작업은 작가가 우리 사회에 대한 무작위적인 비판에서 비롯된 작업들은 아니다. 그 작업들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인 손녀로 이어지면서 여성의 삶을 통해 공감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차별적인 인식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딸 가진 여자는 싱크대 손잡이를 잡고 죽는다>의 작업은 작가가 싱크대 손잡이를 캔버스 중앙에 설치하고 싱크대 손잡이들 아래에 여성들 이름이 하나하나 적어 놓아 그것들을 일렬로 벽면에 배치하여 딸 대신 가사/돌보미를 하셨던 어머니들을 추모하고자 하는 기념비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허복연 할머니 글씨>의 작업에서 ‘딸 낳고 큰 기합 받는다.’는 내용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만연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꼬집고 있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투명한 OHP 필름에 글이 새겨져 있으며, 벽면에서 1cm 가량 떨어져 있어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글씨들이 일렁이게 하여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은 <손톱으로 쓰는 편지>이다. <손톱으로 쓰는 편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성폭력 피해자들이 성폭력 이후의 삶들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자 한 작업이다. 

그가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전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주장하는 담론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건네는 이야기는 할머니로부터 손녀로 이어지면서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차별적인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행하는 그 모든 폭력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시각으로 여성들의 시각을 왜곡하거나 또는 무시함으로써 일어나는 행위들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전은 우리의 삶과 무관한 담론은 아니다. 그가 건네는 이야기는 우리 누이, 또는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이야기이며, 우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역사이다. 역사는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역사도 우리의 삶의 일부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는 그러한 담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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