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영
일상에 대한 기록, 그리고 그 안온한 서정에 대하여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일반적으로 일상이란 반복의 속성이 있어 단조롭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언제나 또 늘 그렇게 느리고 완만하게 시간을 축적하며 한 사람의 하루를 구성하고 삶을 편집해 나간다. 이렇게 축적된 일상의 기록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엇인가 단서를 포착하고 그것을 가공함으로써 평범을 비범으로 환치시키는 것은 바로 예술가의 섬세하고 민감한 감각이다. 그것은 매우 소소하고 평범한 곳에서 비롯하여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점차 확대되고 심화되어 작가의 사유를 담아내곤 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일상이란 삶의 단위인 동시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의 원천인 셈이다.
작가 이보영의 작업 역시 일상에 대한 기억과 그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섬세한 감성으로 자신이 속한 시공의 내용들을 채집한다.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인공물들과 자연물, 그리고 이들의 조화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그것은 굳이 부담스러운 사회적 담론을 이야기하거나 지나치게 몽상적인 가공의 공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익히 익숙한 것들의 나열을 통해 작고 소소한 것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의 작업은 기교적인 가공을 통해 드러나는 현란함이 아니라 마치 조미료가 배제된 나물의 담백함 같은 맑음이 특징이다. 더불어 풋풋한 감성으로 점철된 해맑은 화면은 천진한 동심의 동화, 혹은 잔잔한 울림의 서정시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에 관한 내밀한 성찰로 읽혀진다.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채집된 다양한 이미지들을 나열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한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정연한 질서는 바로 도시화된 현대인의 삶을 그것은 도시화된 공간 속에서 자연마저 가꾸어지는 현실을 통해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기린은 이를 읽어내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작가는 “기린은 나의 사유하는 시선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표출되는 정연한 질서는 획일적인 도시화된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일상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깨트리는 다양한 사물들의 이미지들은 같은 듯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의 이유와 가치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반영한다.
인공물과 자연물, 그리고 서로 다른 일상의 흔적들의 나열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것들의 조합이지만 그들은 각기 독립된 가치로 화면에 자리하며 존재감을 갖는다. 이는 작가의 작업에 일관되게 작용하는 형식적 특징이다. 작가는 같은 듯 하지만 서로 다르며, 반복적인 일상의 평범한 가운데 개별적인 개성과 특질을 지닌 삶의 양태들을 나열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특정한 기억, 혹은 감정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개별 사물들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안온한 정서이며 평범한 일상에 대한 존중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주변과 일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은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정 사물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주변 사람을 연상하는 자체가 소통의 시작이다.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창문처럼 제 그림을 보고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여유를 느껴보기 바란다.”라는 작가의 말은 바로 이러한 구조와 내용에 대한 설명에 다름 아닌 것이다.
녹색을 주조 색으로 한 화면의 구성은 치밀한 구조를 통한 기계적인 아름다운이 아니라 마치 한낮의 산책과도 같은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두드러진다. 인공물과 자연물, 그리고 각기 다른 개성의 공간들은 녹색을 통해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화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이다. 그것은 단지 대상의 외적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교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중첩되는 노동의 집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집요함의 성과이다. 작가는 화면 구석구석을 특유의 집요함과 몰입으로 더듬고 다듬어 밀도를 높인다. 그것은 마치 자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이루어지는 시간의 축적이다. 이러한 건강한 노력의 집적이 평범한 일상의 단조로운 나열을 돌연 비범한, 그리고 볼만한 것으로 환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다분히 인간적인 따뜻한 정서의 표출이다. 이는 기교나 기법이 아닌 작가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으로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일 것이며, 바로 작가가 바라보는 일상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삶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다.
모든 작업은 그것이 속한 시대와 필연적으로 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인간과 자연은 문명이 시작된 이래부터 비롯된 본질적인 문제이다. 더불어 도시화된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반복적인 일상은 종종 삶의 의미와 본질을 왜곡시켜 본연의 가치를 회의케 한다. 일상의 권태와 피로감은 바로 이러한 것에서 비롯되는 삶의 찌꺼기와도 같은 것이다. 작가는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인의 삶을 따뜻한 감성으로 보듬어 안는다. 그것은 단순히 일상에 대한 냉정한 기록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며, 자신의 주변에 대한 따뜻한 시각의 반영인 셈이다. 도시화된 삶은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무한경쟁의 틀로 내몰리게 마련이다. 각박하고 쉴 틈이 없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작가가 전해주는 따뜻한 서정의 메시지는 편안한 안식의 쉼터와도 같다.